인도는 종교의 나라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다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도인의 생각, 생활 등 모든 것이 종교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힌두교다. 12억 인구 중 힌두교는 80.5%나 된다. 그 외에 이슬람교 13.4%, 기독교 2.3%, 시크교 1.9%, 자이나교 0.4%이다. 그런데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겨우 0.7%로 1천만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하여 불교의 탄생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을 한 번 살펴보자. 불교의 탄생 배경 B.C. 6세기는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종교의 탄생 등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진 시기다. 중국의 유교,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등이 새로운 사회ㆍ종교적 질서를 외치며 나타났다. 인도에서도 이 시기에 갠지스 평원을 무대로 무려 62개의 종교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중에서 자이나교와 불교가 가장 큰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고대 인도사회는 베다시기를 지나면서 출생 신분에 의거해 4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제사를 주관하는 승려와 선생, 학자 계층의 브라만, 관료와 군대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 농업과 목축, 상업을 담당하는 바이샤, 그리고 상위 3개 계급을 최하층에서 봉사하는 수드라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최상위의 브라만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형벌도 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구조에 불만을 가진 크샤트리아 계층에 의해 브라만의 종교적 신성특권을 부정하는 운동이 새로운 종교 탄생의 한 요인이 됐다. 자이나교 창시자 마하비르(Vardhaman Mahavir)와 불교의 창시자 붓다(Gautam Buddha)가 크샤트리아 계층이었으며, 이들이 브라만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북인도 갠지스 평원의 중심인 우따르쁘라데시, 비하르지역은 현재처럼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당시에는 강수량이 많아서 숲이 우거진 열대 우림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B.C. 600년께부터 이 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숲을 개간하고 농경인구가 급증하게 됐다. 이들은 소와 같은 가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베다의 종교적 전통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를 대규모로 도살해야 했다. 여기서 베다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농사를 위해 가축을 유지하려는 세력 간의 사회적 마찰이 새로운 종교 탄생의 배경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불교를 지원하게 된 이유 또한 이 시기에는 도시들도 많이 생겼다. 쿠시나가르, 바라나시, 라즈기르 등 불교 성지로 알려진 북인도 중앙의 갠지스 평원일대에 도시가 대거 발달하면서 상인과 수공예업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동전 사용이 처음 등장한다. 동전의 사용은 상인들의 거래 활성화를 유발해 바이샤 계층이 사회적으로 부상하게 된다. 자연히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종교를 원하게 되면서 자이나교와 불교를 적극 지원하게 된다. 그들이 자이나교와 불교를 지원하게 된 이유는, 첫째 두 종교는 태어난 신분에 따른 계급 구분을 부정했고, 둘째 비폭력을 주장하는 이들 두 종교에 의해 군소 왕국들 간의 전쟁이 줄어듦으로서 안전한 상업 활동을 보장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브라만의 율법(Dharmasutras)은 이자를 금지하므로 대부업을 하는 바이샤들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상인들이 자이나교와 불교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성직자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금이나 은을 만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단지 생명을 유지할 만큼만 후원자들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의 탁발 전통이 불교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도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청교도적인 금욕생활이 우리나라 스님들의 전통에도 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공통점이 매우 많았다. 창시자가 모두 크샤트리아 계급이었고, 브라만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동물을 제물로 올리는 것도 반대했다. 두 종교 모두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계급에게 호응을 받았다. 경제력은 있으나 그에 걸맞는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바이샤 계급, 항상 억압만 받는 수드라 계급이 자이나교와 불교의 주된 지지층이었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카스트제도를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라 해도 브라만과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점에서 반 카스트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폭력과 살생을 반대하는 아힘사(ahimsa : 비폭력) 원리는 B.C. 6세기 무렵 인도의 물질문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극단적인 비폭력 강조는 직업상 곤충, 해충 등을 죽여야 하는 농민계층에게는 방해가 됐고, 동물의 뼈 등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수공예업자들도 마하비라(Mahavira : 자이나교 창시자)의 생각을 거부하게 됐다. 자이나교는 개인 재산, 특히 토지 소유를 부정하게 됨에 따라 신도들은 상업에 치중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자이나교도들은 도시문화의 확산과 해상교역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차이점 자이나교와 달리 불교는 아힘사를 극단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비록 다른 생명체를 해하지 말라고는 해도 불교도가 아닌 도살자가 공급하는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했다. 불교는 가축을 경작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어서 농민계층의 이해와 합치되었다. 부처는 ‘한 승려가 마하비지타(Mahavijita) 왕에게 농부에게는 씨앗을, 국가 공무원에게는 가축 등을 주라고 한’ 설화를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자이나교와의 이러한 차이점은 불교가 당시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농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만교의 교리에 따르면, 브라만 계급은 술・향수・옷・곡류의 교역은 금지돼 있다. 이런 물품을 거래하는 사람들은 천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인도 첸나이 무역관장으로 주재 할 때 일이다. 스리니바산이라고 당시 주정부 차관을 잘 알고 지냈다. 그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로연에 사용하라며 양주를 선물하였는데 그는 끝까지 사양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는데 브라만 계층인 그로서는 술을 선물로 받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상교역에 대해서는 불교와 자이나교는 비슷한 입장이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저주 받을 일이라고 생각한 시대에 불교는 항해를 인정했다. 당연히 바다를 건너 교역을 하는 신흥 상인계층은 불교를 지지했다. 불교의 탄생과 중흥, 전파 석가는 기원전 560년에 태어나 기원전 480년에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석가가 태어난 곳은 히말라야산맥의 팔파산 기슭의 룸비니이다. 룸비니는 현재 네팔 국경 안에 있다. 석가의 정식 이름은 싣다르타 고타마(Siddhartha Gautama)이다. 29세에 출가한 석가는 35세에 보드가야에서 깨달았으며 80세에 쿠시나가르에서 입적하였다. 석가가 설교를 하고 다닌 곳은 주로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으로서 현재의 비하르주 남부, 우따르 쁘라데시주 동부지역 일대다. 불교의 4대 성지는 현재의 지명으로 볼 때 북인도 우따르쁘라데시 주 동쪽에 고락뿌르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탄생지 룸비니는 고락뿌르에서 약 100km 북쪽 네팔영토 내부에, 입적지 쿠시나가르는 고락뿌르에서 동쪽 55km에,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녹야원)는 고락뿌르에서 남쪽 170km에, 해탈지 보드가야는 고락뿌르에서 동남쪽 200km 지점에 있다. 사르나트 바로 옆에 힌두교도들의 최대 성지인 바라나시가 있다. 석가는 탄생(jati)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카스트 제도를 거부하고 인간의 행위, 생각, 생활 방식 등에서의 옳고(samyak), 그름(mithya)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석가가 창시한 불교는 이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에 의해 융성기를 맞이한다. 아쇼카 왕은 힌두쿠시에서 벵갈만,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 등까지 영토를 넓힌 정복군주였다. 동부 인도지역의 콜카타 남쪽 오릿사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벌인 칼링가(Kalinga)전투에서 대량의 인명살상과 파괴를 자행한 아쇼카 왕은 비참한 현장을 보면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후 그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는 일에 여생을 바친다. 즉 ‘신앙에 의한 정복’(Conquest by Piety ; Dharma Vijaya) 이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마우리아 왕조가 망한 후 AD 1세기에 쿠샨왕조가 들어섰다. 3대 카니시카 왕(AD 125-162)의 노력으로 불교는 다시 한번 중흥기를 맞이하고 그리스 양식이 접목된 간다라 미술이 유행한다. 이 시기에 불교의 해외전파가 이루어져, 이후 동남아시아와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전해져 현존하게 된 것이다.
도시의 발전은 1차산업 위주의 농경문화를 탈피한 산업화와 함께 외부 유입 인구의 점차적인 증대와 궤를 같이한다. 이런 의미에서 북부동 똑딱걸(얼마 전 이전한 시외버스터미널 자리의 옛 이름) 주변 농지를 사들여 공설운동장과 체육관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1986년이 그 시발점이 되겠다. 물론 그 배경에는 1970년대 후반에 조성하기 시작한 양산지방공단을 중심으로 인근 부산의 중소기업들이 우리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지역경기가 부양하고 노동력의 필요에 의해 인구증가가 이루어졌다. 1982년 9월 지역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상공회의소 설립을 준비하게 된다. 양산공단에 입주한 기업을 주축으로 발기인대회를 거쳐 설립허가를 받아 그 해 12월 28일 세신실업 노성권 대표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돼 다음 해 정초 현판을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지금의 시세(市勢)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전국 군 단위에서는 유일하게 상공회의소 설립이 승인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 뒤, 밀양 출신 이두연 군수는 몇 가지 전환점이 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종합운동장의 건설과 삽량문화제 출범이 그것이다. 1986년 시는 북부동 471-11번지 일원 약 13만8천㎡에 종합운동장을 조성하기로 하고 5월에 도시계획결정고시를 한 뒤 토지 매수에 나선다. 당시 이 곳은 양산천 영대교 진입로 우측으로 제방을 따라 포도밭이 조성돼 있고 지금의 주차장을 가로질러 북부천에서 갈라진 용수로 양쪽으로 벼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으로 시는 당시 경남도 내에서의 군세(郡勢)에 비해 문화적 구심점이 없음을 절감하고 군민의 애향심을 고취하면서 지역화합을 도모하고자 10월 5일을 군민의 날로 제정했다. 첫 군민의 날을 기해 문화행사를 발족하였으니 바로 삽량문화제다. ‘삽량’이라는 이름을 붙인 연유는 이렇다. 1973년 당시 동래군(지금의 부산 기장군 일원)과 통합해 양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적 명칭이 필요했는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신라 때 삽량주가 해당됐다. 그래서 삽량문화제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됐다. 1986년 10월 4일부터 3일간 개최된 제1회 삽량문화제는 상공회의소 회장을 추진위원장으로 해 문화행사 40종목, 체육행사 8개 종목으로 진행돼 군민화합의 한마당이 됐다. 당시는 읍ㆍ면 대항 체육경기의 열기가 대단했다. 옛 동래군 지역의 기장읍, 일광면과 장안읍이 강세를 띠었고 웅상면이 자웅을 겨루는 정도였다. 경기가 펼쳐지는 주변에는 읍ㆍ면에서 올라온 응원단들이 천막을 치고 잔치를 벌이며 흥겨워하곤 했다. 삽량문화제는 2000년대 들어서 체육행사를 분리하기도 했고, 오근섭 시장 재임 시 침체 탈피를 위해 삽량문화축전으로 이름을 바꿔 대규모 시민위안잔치로 거듭나게 된다. 한편, 이두연 군수의 적극 지원으로 설립을 준비한 문화원은 1986년 2월 26명의 임원을 구성해 인가를 신청하고 4월 현판식을 가졌다. 그 해 7월 12일 문화공보부의 인가를 받은 양산문화원은 김두성 원장, 이형우, 공태도 부원장에 서춘식 사무국장 체제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제2회 삽량문화제부터 주관하게 된다. 1986년 시작된 종합운동장 조성사업은 10년 뒤인 1996년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당시 사업비 6백3억6천만원을 투입해 실내체육관과 주경기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그리고 보조경기장과 부대시설 조성공사에 들어갔다. 1996년 12월 착공한 실내체육관이 2000년 11월 가장 먼저 준공됐다. 3천409석의 관람석을 보유한 체육관 개관 기념으로 전국장사씨름대회가 열려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운동장 주경기장은 363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4년의 공사 끝에 2002년 9월 준공됐다. 그 때 마침 2002한일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렸다. 새로 조성된 주경기장에서는 인근 부산 등지에서 개최된 월드컵 예선과 본선 경기가 전광판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돼 가족들과 나들이 나온 시민들은 소풍과 응원을 함께하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4강 진출을 환호하기도 했다. 제1회 삽량문화제가 운동장 부지로 확정된 북부동 일원에서 먼지가 풀풀 나는 바닥에서 진행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턴가 잘 정비된 양산천 고수부지에서 다양한 축제로 펼쳐지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염소고기는 풍부한 단백질과 칼슘을 함유하고 있어 건강식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임산부, 허약체질인 사람에게 보약으로 통하고 있다. 본초강목에는 염소고기가 원양을 보하며 허약을 낫게 하고 피로와 추위를 물리치며 위장의 작용을 보호하고 마음을 평안케 한다고 나와 있다. 철분은 빈혈을 막아주며, 칼슘은 임부가 태아에게 빼앗긴 칼슘을 보충하고,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에게는 직접 필요한 영양소가 되는 것이다. 특히 흑염소 고기는 근육섬유가 연해서 소화 흡수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 함량도 쇠고기의 절반가량 밖에 안들어 있어 소화가 잘 된다. 또 비타민 E가 많은 것이 특색이다. 비타민E 즉, 토코페롤은 세포의 노화를 방지하고 불임을 막아주는 작용도 하므로 흑염소가 보약으로 전래된 것도 이 때문이다. 염소고기는 옛날부터 보혈작용과 함께 근육을 튼튼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소의 간에는 비타민A가 다른 동물의 간보다 월등히 많아서 야맹증과 노년기의 시력감퇴에 유효할 것이다. 염소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 식재료 염소고기와 인삼,아몬드를 배합하면 철분과 단백질의 흡수를 상승시킬 수 있어서 음식궁합이 잘 맞는다. 음양곽,마늘,부추 등과 배합하면 양기를 늘리고 속이 허하고 냉한 데 아주 효과적이다. 특히 염소고환과 녹용을 배합해 가루 내어먹으면 정액의 양과 정자활동을 늘려서 남성불임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 염소고기와 궁합이 맞지 않는 식재료 그러나 염소고기와 메밀,콩장,식초 등을 배합하면 안 좋다. 또한 염소고기와 죽순을 함께 먹으면 독이 될 수 있으며 이상이 있을 시 쌀뜨물이나 미음을 끓여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사슴고기의 성질은 달고 따뜻하며 무독해 비경, 신장경에 작용한다. 1. 동맥경화증, 고혈압 등 성인병을 예방한다. 고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100% 알카리성 완전식품이다. 2. 건강과 정력, 오장의 기능을 왕성하게 한다. 또 젖 분비가 되지 않을 때 삶아 복용하면 젖 분비를 촉진하고 소화기 계통을 도와 영양흡수를 촉진하므로 전신의 기능을 왕성하게 해 준다. 3. 특히 비타민B군이 많이 들어 있으며 균형 있는 단백질과 각종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어 피부를 윤택하고 탄력 있게 가꾸어준다. 4. 어린이의 발육 성장과 수험생의 건강식, 노인의 노화방지에도 유익하다. 5. 철분이 많이 들어 있고, 체내 흡수율도 높아 철 결핍성 빈혈을 예방한다. 특히 사슴이 생산하는 녹용은 재생 불량성 빈혈, 즉 백혈병을 치료하는 의약품의 원료로 쓰이고, 골수내 조혈기능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사슴고기와 궁합이 맞지 않는 식재료 사슴고기는 꿩고기나 새우와 함께 먹으면 부스럼이 생기기 쉬우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또한 굴피 차가루와도 맞지 않으며 오가피와도 잘 맞지 않는다. 사슴고기를 먹을 때에는 생야채에 쌈을 한다거나 생나물과도 잘맞지 않는다. 말고기가 최근 건강식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육질이 좋아서 소화가 잘되며 맛도 뛰어나지만 융점이 높아 콜레스테롤이 축적되기 쉽다. 반면 말고기는 융점이 낮아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성인병 걱정이 덜하다. 또 말고기는 고혈압, 신경통, 당뇨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제주에서는 매년 섣달에 암말을 잡아서 건마육(육포)을 만들어 조정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은 말고기가 양기를 돕는다 하여 즐겨 먹었다’고도 적혀 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금기시 하면서도 뛰어난 맛 때문에 왕가에서는 말고기를 쉬쉬하면서 먹었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달라졌다. 말고기의 맛과 효능이 입소문을 타면서 말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말고기 전문점도 많이 생겼다. 말고기의 효능 말고기의 약효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의보감에는 말고기가 신경통과 관절염, 빈혈, 척추에 좋다고 기록돼 있다. 최근에는 말고기의 의학적 기능에 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농촌진흥청 난지농업연구소에서 발간한 ‘말고기 요리’ 소책자에 따르면 말고기에는 콜레스테롤 감소에 효과적인 성분인 팔미톨레산이 돼지고기와 쇠고기보다 2~3배나 더 많다. 팔미톨레산은 피부를 보호하는 피지의 주요 성분으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감소시키고 강력한 항균작용을 하며 췌장의 기능을 향상시켜 인슐린 분비를 증가시킨다. 말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 식재료 말고기는 배, 마늘, 부추, 각종 버섯류와 궁합이 잘 맞으며, 앙파 감자 등과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생강, 매실과는 서로 맞지 않으며 파무침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문헌: 식료본초, 동의보감, 약선재료학(강무근 최미애 외), 약선조리 이론과 실제(한복선 외)
커피전문점 대표와 사회복지사가 만나 ‘카페사회사업가’라는 이상한(?) 직업이 탄생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꿈은 협동조합이란 형태로 진행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마을 공동체’를 꿈꾸는 그에게 ‘골목’, 그리고 ‘골목 상권’은 어떤 의미일까? “요즘 골목은 저희 어린 시절 골목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미 오픈된 공간이죠. 그래서 다양한 업종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들어서는 거고요. 그러면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준비해야죠.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인정해야 하고, 변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골목은 이미 과거와 많이 달라진 상태”라고 말했다. 더 이상 마을 주민들만의, 아이들만의 놀이터가 아니다. 열려있는 골목에는 과거 골목과는 이질적인 것들도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단순히 단골장사, 동네장사로는 변해버린 골목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의미다. “경쟁력이란 것은 곧 지속가능한 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점프를 하기 전에 움츠리는 것처럼 잠시 주춤하는 시간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시간은 결국 더 먼 곳으로,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한 투자의 시간이 돼야 합니다.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인 것이죠” 변해버린 골목.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골목상권의 경쟁력은 남아있다고 설명한다. ‘공동체’, ‘사랑방’ 개념은 대형프랜차이즈가 갖출 수 없는 골목상권만의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커피전문점 시설은 사실 대형프랜차이즈 업체가 더 편안하고 예쁩니다. 그럼에도 개인전문점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거리가 가까워서 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즐기고, 편하게 수다를 나눌 수 있는, 언제라도 편한 마음, 편한 복장으로 찾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은 다시 그 가게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습니다” 골목상점은 억지로 만들 수 없는 사랑방과 같은 존재. 사람들이 저절로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찾아오는, 그래서 저절로 수다를 나누게 되는 골목 아지트 같은 공간이어야 한다. 이 씨가 말하는 골목상점은 곧 ‘편안함’이고, 이는 골목상점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지난 16일은 ‘봄이 머무르는 공간’ 이란 의미의 ‘소소봄’이 물금읍 범어신도시 택지에 문을 연지 정확히 2년째 되는 날이다. 이우석(33) 대표가 가게 문을 열 당시 주변에는 커피전문점은 두 개 뿐이었다. 지금은 스무 곳이 넘는다. 짧은 시간에 커피전문점은 우후죽순 늘어난 것이다.
1900년대 전반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영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세계 리더로 떠 오른 미국은 소련과 패권경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미ㆍ소의 다툼은 미국측의 서유럽과 소련측의 동유럽간의 양진영으로 나뉘어 경쟁했다. 여기서 인도는 어느 진영과도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비동맹을 내세워 유고, 인도네시아 등과 함께 아시아, 아프리카의 약소국을 규합하여 제3세력의 수장역할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도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고 소련과 가깝게 지낸다. 따라서 미국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인도를 소련으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 하나의 목표였으며 소련 및 동구권이 붕괴되어가던 80년대 말에 이르러 그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비동맹의 맹주에서 친미로 돌아서 80년대 후반부터 무역 및 재정적자가 늘어난 인도는 90년 초에 교역규모 300억불에 외채가 700억불에 달하게 되고 무역수지 적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90년 하반기에 들어 IMFㆍIBRD 등 국제금융기관이 인도에 대한 외환을 통제하고, 일본ㆍ영국 등이 원조를 축소하는 등 이에 동참하면서 외환위기가 악화됐다. 인도정부는 정부보유 금을 영국, 스페인에 매각하는 등 자구노력을 했으나, 결국 91년 1월 외환부족으로 당분간 수출입을 전면 중지한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인도에 IMF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달러보유고 부족으로 수출입 중단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내몰린 인도는 걸프전이 발생하자 미국 군용기에 급유를 해주는 등 미국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 때문에 중동ㆍ아프리카 및 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미국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또한 인도는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자국 통화 루피화로 결제하던 것을 중지했다. 당시 인도는 생필품을 구소련에 수출하고 군수물자ㆍ기계류를 수입했다. 통화는 달러 대신 루피화로 사후 정산하는 소위 ‘루피 트레이드’를 채택해 소련과 군사적ㆍ경제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에 처하자 인도가 무역 대금을 달러로 결제할 것을 소련에 요청하였으나 소련도 달러가 부족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양국간 루피교역은 중단됐다. 냉전 시절 제3세계 비동맹국의 맹주로서 세력균형의 한 축을 이루던 인도가 몰락하면서 미국의 앞잡이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신도시 건설사업이 추진되면서 양산은 제2의 도약을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발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기만 했지 원래 지역의 중심이었던 중앙동지역이 이렇듯 쇠락할 것으로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혹자는 신도시 건설사업 초기에 원도심과의 단절을 가져온 단지계획을 비난하기도 한다. 양주초등학교 주변의 1단계 개발 당시 택지 분양을 용이하게 할 요량으로 중심상업지구를 뒤로 미루고 주택지부터 먼저 조성한 결과라는 것이다. 지금의 이마트 주변의 중심상가를 원도심과 인근한 1단계 지구에 배치하고 신도시와 구도심을 연결하는 대로를 개설했더라면 서로 공존하는 도시계획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원도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양산시 북안남5길 21. 새 도로명으로 자리잡은 이곳은 중앙동주민센터가 있는 곳이다. 1996년 시로 승격되면서 중앙동과 삼성동, 강서동으로 분동되기 전까지는 양산읍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또한 1983년까지는 군청이 자리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도심이란 ‘도시의 중심부로 관공서ㆍ회사ㆍ은행ㆍ사무소 따위가 모여 있고 정치적ㆍ경제적 기능의 중심이 되어 가장 번창한 곳을 이른다’고 사전에는 나와 있다. 과연 그랬다. 1970년대 후반 양산읍 소재지의 소도읍가꾸기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도시 면모가 일신하기 시작했다. 북부동 군청시대는 과거 조선시대 동헌이 있던 일대여서 역사적 의미도 있었다. 양산초등학교에서 고개를 내려오면, 보건소(뒤에 문화원으로 바뀌었다가 최근 노인복지회관 건축을 위해 철거됨)가 있었고, 군청 본관과 민원실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양산면사무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 사업장이 돼 있다. 군청과 담장을 경계로 경찰서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노인회 양산시지부와 장애인단체에서 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당시 군청 금고 역할을 했던 농협중앙회와 등기소가 자리했다. 이렇듯 북안남5길은 1980년대 초까지 양산의 행정 1번지였다. 그러다 보니 주변 음식점 등 상가는 호황을 누렸고, 북안, 장동 일대는 원도심의 터줏대감으로 위세가 등등했다. 1983년 내무부로부터 지방관청 청사로는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았던 남부동 군 청사가 완공되면서 며칠간의 이삿짐 트럭이 줄을 이었다. 북부동의 편안한 동네를 떠나 황량한 옥곡산 자락에 둥지를 튼 군청은 소속 공무원들은 물론 민원인들로부터도 한참동안 원성을 들었다. 사진에서 보듯 주변에 만만한 식당이나 상점도 하나 없는 곳에 관청이 들어섰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자가용도 귀한 시절인지라 버스를 타고 출입해야 하는 시민들의 불편도 컸다. 그것보다는 북부동 주민들의 심리적 박탈감이 사실은 더 큰 문제였다. 오랫동안 양산의 중심부로 터줏대감처럼 행세해 온 이곳 토박이들에게는 군청의 이전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주변 상가들도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다른 공공기관들이 옮겨가기 전이라 그런대로 도심의 명맥은 유지했지만, 신도시 조성과 함께 소방서, 보건소, 교육청 등이 차례로 이전하고 끝내 경찰서마저 범어로 옮겨가면서 원도심의 쇠퇴는 절정을 맞이하게 됐다. 황량한 산 자락에 터를 잡은 군청은 13년 뒤 시청으로 승격하면서 발전하는 시세(市勢)에 걸맞게 문화예술회관과 의회청사 건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서서히 ‘액티브 양산’의 면모를 갖추어 간다. 그러나 원도심의 전성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북부동 군청시대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3월 1일 양산시 제2청사가 개청되면서 주변지역을 비롯하여 원도심이 활력을 되찾아 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원도심은 역사의 흔적을 복원하여 옛날 양산의 모습을 시민에게 보여 줌으로써 역사적 자긍심을 느끼게 하면서 원도심의 특징을 부각시켜 활성화해야 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양산읍성, 옛 동헌, 각종 누각 등을 복원하여 옛 양산의 모습을 살리는 것이다, 다행히 이번 보궐선거에 당선된 시의원이 선거 공약으로 원도심을 활성화하는데 온 힘을 다 하겠다고 했으니 기대해 볼 만 하다.
지난 27일 양산시민이 음악으로 추억에 美쳤다.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양산시민신문 창간 10주년 기획공연으로 마련된 양산시민 대화합 힐링 콘서트 ‘추억에 美치다’에 많은 시민이 참여해 옛 추억을 되새기며 음악으로 소중한 기억을 공유했다. 3시간에 걸친 공연은 80~90년대 인기를 누렸던 가수 심신을 비롯해 동물원과 박정수, 마로니에가 출연해 그 당시 인기곡과 히트곡을 부르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소중한 옛 추억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오후 7시 30분 공연의 첫 번째 무대는 꽃미남 가수로 90년대 원조 아이돌 가수로 가요톱10 골든컵을 수상한 심신 씨의 노래로 시작했다. 오직 하나뿐인 그대, 욕심쟁이, 드림인러브 등을 부르며 무대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가수 심신의 상징과도 같은 선글라스와 권총춤은 그리움 가득한 그때로 돌아가게 한 듯한 착각을 불러올 정도였고, 그의 히트곡으로 관중과 함께 호흡하며 노래를 불렀다. 공연을 보러 온 오선주(물금읍)씨는 “노래를 들으면서 굉장히 재미있었고, 흥겨웠다. 특히 첫 번째 가수인 심신 씨의 노래를 들을 때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정말 좋았다. 이런 공연 자주 해 주었으면 좋겠다”면서 “양산시민신문이 시민을 위해 좋은 소식을 많이 전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머릿속 아득한 기억들을 그리워하며 듣는 노래들은 정말 우리를 추억에 美치게 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두가 공연에 푹 빠져 함께 호흡했다. 두 번째 무대는 ‘널 사랑하겠어’라는 노래로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게 만든 그룹 동물원이 나와 무대를 즐겼다. 그룹 동물원의 따뜻하고 감성 어린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노래를 불러줘 좋았다. 또한 천재적인 가수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같은 멤버로 활동한 고 김광석 씨의 노래를 들려주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세 번째 무대는 데뷔한 지 23년이 되었고, 현재 충청대학교 실용음악과 전공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가수 박정수 씨의 무대였다.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이라는 노래는 들을수록 섬세한 목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미성이 더욱 돋보이게 해 시민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나동연 양산시장이 공연장을 찾아 무대에 오르자 시민들이 “노래해, 노래해”하며 주문했고, 시민에게 호응하듯 40년 전 기타실력과 함께 노래를 들려줘 양산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뜨거운 환호와 함께 박수를 받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1994년 ‘칵테일 사랑’으로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마로니에 무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들의 시간을 만든 소중한 시간이 됐다. 3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함께 박수를 치며 옛 추억에 미쳐 노래한 힐링 콘서트 ‘추억에 美치다’는 양산시민들 모두에게 옛 추억을 공유한 좋은 시간이 됐다. 올해 10주년을 맞는 양산시민신문이 음악으로 추억에 미치듯 양산시민과 함께 양산시민의 신문으로 서로 공감하며 소통할 수 있는 신문으로 발전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고광림 시민기자 photokwang@hanmail.net
영축산 자락에 자리잡은 통도사 암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서운암에는 금낭화, 할미꽃, 유채꽃, 조팝나무 등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100여종의 야생화로 가득 찼다. 이와 더불어 전국 문학인들이 피워낸 시, 시조, 동시, 수필 300여점은 서운암을 찾은 상춘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연등축제 기간이었던 지난 27일 서운암에서는 제12회 들꽃축제와 제3회 전국문학인꽃축제가 열렸다. 결성 이후 첫 공연을 펼친 서운암 예술단의 축하 공연으로 시작한 행사는 박진희 시인이 기획한 시 퍼포먼스 ‘꽃을 위한 연가’로 본격적인 축제의 막이 올랐다. 더불어 ‘꽃 시에 나타난 양면성’이라는 주제로 전국문학인꽃축제 정영자 운영위원장이 문학 강연을 펼쳤으며 이바디 예술단의 모듬북 공연 등으로 열기를 이어갔다. 전국문학인꽃축제 정영자 운영위원장은 개막식에서 “한국 불교의 시작이자 지침인 통도사의 큰 절 서운암 뜰에서 의미있는 문학인축제를 열게 됐다”고 운을 뗐다. 이어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수많은 문학인들의 아름다운 문학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말했다. (사)한국전통문화연구원 이사장이기도 한 서운암 성파 스님은 “서운암 광장 4만평 내에 한국에 있는 모든 야생화를 모시고 올해도 여러분을 맞이하게 됐다”며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야생화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분들의 관심으로 올해도 전국문학인꽃축제를 열게 됐으며 앞으로도 서운암이 한국 전통문화의 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이날 1회를 맞이한 전국꽃문학상에서 한국예총 양산시지회 김보안 회장이 시조시 ‘얼음새 꽃(복수초)’로 우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연등축제의 역사는 신라 경문왕 6년 황룡사에서 간등(看燈)을 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후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연등회는 국가적인 행사로 여겨지며 음력 정월 보름과 2월 보름에 왕과 온 백성이 풍년을 기원하며 궁궐부터 시골까지 화려한 연등을 밝히고 잔치를 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국가 주관의 연등회 대신 민속행사로 남아 전승됐다. 아이들은 등을 만들기 위해 비용을 구하는 호기놀이를 했고 밤에는 등으로 가득 찬 마을을 구경하는 관등놀이가 성행했다. 연등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부 내용이 변질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설교, 강연, 음악, 무용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리는 연등회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후에 1975년부터 사월초파일이 국가 공휴일로 제정돼 더욱 많은 인원이 연등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들의 문화축제로 자리 잡은 연등축제가 통도사에서도 처음으로 열렸다. 통도사(주지 원산 스님)가 주최하고, 하북면발전협의회(회장 이성휘)가 주관해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진행된 ‘제1회 통도연등축제’로 통도사는 세상을 밝히는 지혜의 ‘연등’으로 밝게 빛났다. 축제 첫날인 26일은 통도사 산문 일대에 향토음식 체험장 등 지역 특산물 부스를 비롯해 탁본체험, 연등 만들기 등 불교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또한 부스 주변에 코끼리등, 연꽃등, 동자승등과 같은 대형 전통등과 장엄등을 전시했다. 지난 27일에 진행된 제등행렬은 이번 연등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용 모양 연등을 선두로 동자승등, 사천왕성등, 코끼리등과 같은 다양한 연등이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통도사 산문 앞에서 시작해 신평 삼거리, 신평 터미널을 지나 다시 산문으로 돌아오는 제등 행렬에는 시민들도 직접 참여해 시민의 축제로 거듭났다. 연등축제의 막은 28일에 열린 기념음악회로 마무리 지었다. 통도사 산문 앞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서 열린 기념음악회에는 양산시립합창단을 비롯해 인기가수 현철, 김양, 김국환 등이 무대에 올라 시민들에게 흥겨운 공연을 펼쳤다.
양고기는 항암물질(CLA)을 함유하고 있어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고 감소시켜 피부암, 결장암, 유방암에 현저한 효과가 있다. 저칼로리, 저지방, 고단백, 고칼슘으로 다이어트에 좋고 수술 후에 의사들이 권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육질이 부드러워 노인과 어린이가 먹기에도 좋다. 또 양고기는 아미노산 함유량이 소나 돼지고기보다 높고 풍부한 비타민과 칼슘, 인, 철 등 광물질이 기타 육류보다 풍부하여 인체에 이롭다. 맛은 달고 성질은 온성이다. 비경ㆍ신경에 들어간다. 단백질, 지방, 당, 비타민 A, B1, B2, 니코틴산이 들어 있다. 효능 1. 보양, 다이어트식품이다. 양고기 특유의 따뜻한 성질 탓에 열량이 높아 겨울철에 먹으면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추위를 막을 수 있다. 2.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 등 문헌을 살펴보면, 정력과 기운을 돋우고 비장과 위를 튼튼히 해 준다고 나와 있다. 3. 오장을 보호하며 어지럼증(혈압)을 다스리는 효능이 있다. 4. 당뇨, 술 중독, 몸의 독성해소, 장내해독 살균, 이뇨, 피부미용, 피로회복, 노약자의 양기부족, 골다공증에 효능이 있다 5. 비ㆍ위의 양허(양기부족)에 의한 반위, 구토, 몸이 여위고 부을 때나 산후복통, 허약, 그리고 신양허에 의한 음위, 외한(畏寒), 허리의 냉증과 통증, 한산(寒疝)에 적합하다. 부위별 명칭과 조리용도 양고기 요리용으로는 주로 한 살 미만인 램(Lamb)이 사용된다. 숄더 주로 어깨를 중심으로 한 부분으로, 목과 정강이가 붙어있다. 지방이 많고 근육이 많지만 로스트나 구이에 적당하다. 롱로인 쇠고기에서 말하는 로스에 해당하는 등 부분으로, 랙과 쇼트로인을 합쳐서 롱로인이라 한다. 모두 뼈가 붙은 채로 로스로 이용하거나 스테이크로 적당하며, 꼬치구이, 불고기, 또는 얇게 썰어서 샤브샤브 등으로 사용된다. 가슴살과 프랭크 가슴살은 스페어리브 로스로 하거나 조림 스튜용으로 이용한다. 복부의 살은 지방분이 많기 때문에 가공용으로 이용된다. 레그 허리부분부터 다리에 걸친 살로 뼈가 붙은 채로 로스트해서 파티 등에서 자르면서 먹기에 좋은 크기이며, 뼈를 제거하여 스테이크나 불고기용으로도 사용된다. 램롤 양고기의 숄더나 레그의 부분을 얇게 잘라 말아서 모양을 만든 것을 램롤이라고 한다. 냉동한 것이 대부분이며 값이 싼 편으로 롤째로 로스트 하거나 볶음 요리로 사용된다. 양고기와 궁합이 잘맞는 식재료 당귀와 양고기는 보혈온경(補血溫經), 볶은 생강은 온양산한(溫陽散寒)과 맥을 통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함께 복용하면 양혈(養血)ㆍ온통경맥(溫通經脈)의 작용이 있다. 산후의 혈허로 배가 차고 통증이 있을 때, 혈허로 생긴 포한(胞寒)의 월경통에 효과가 있다. 대추 항알레르기 작용과 혈압강하 효과 및 이뇨작용을 하므로 양고기와는 잘 어울린다. 또한 대추는 자양강장 효과도 뛰어나며 기관지천식 완화효과, 피부연화 효과 등도 있다. 인삼은 기를 보하고, 양고기는 형체를 보한다고 한다. 양기를 튼튼하게 하여 정(精)과 혈(血)을 보하며, 근골을 튼튼하게 하고 땀구멍을 치밀하게 하여 찬바람을 막아준다. 또한 중초와 하초를 따뜻하게 한다. 로즈마리는 강한 향기와 살균력까지 가지고 있어 양고기 로스트나 탕을 끓일 때 곱게 다져 넣으면 양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고 맛있는 향이 있게 해준다. 카레가루 양고기 꼬치구이 등에 카레가루를 살짝 뿌려 구우면 누른냄새가 제거되고 특유의 카레맛과 향이 어우려져 아주 좋다. 두부는 성장기 어린이 두뇌 발달과 뼈와 근육의 성장을 도우며 갱년기 증상을 완화시켜주며 양고기와 함께 먹으면 열을 내리게 하는 작용과 갈증을 막아주는 효능이 있다. 이밖에도 생강은 찬 성질을 지니고 있어 탕에 넣어 끓이면 효과적이며 연근, 감자, 등은 청량 해독 효과가 있으며 각종 채소나 버섯류는 양고기와 잘 어울린다. 양고기와 궁합이 맞지않는 식재료 매운 조미료 양고기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열성식품이기 때문에 고춧가루 같은 매운 조미료를 사용하면 지나치게 열성이 합쳐져 좋지 않다. 녹차의 카페인 성분은 아데노신 길항작용으로 인해 중추신경자극과 항우울제 효능이 있으며 지질분해를 촉진한다. 또한 암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는 임상적 증거가 있으며 구강세정제 역할도 하지만 양고기를 먹고 바로 녹차를 마시면 변비에 걸리기 쉽다. 호박 본초강목에서는 호박을 속을 보해 주는 식품이나 장복시 각기, 황달이 생길 수 있다고 하였는데 특히 양고기와 함께 먹으면 무좀이나 황달이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식초 양고기요리 등에 식초를 첨가하면 심장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불량반응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주의사항 양고기는 열성식품이기 때문에 열성체질인 사람은 양고기를 많이 먹지 않도록 해야 하며 치통, 인후통, 변비, 담황(痰黃), 배뇨 시 통증 등 열이 성한 증세가 있을 때는 양고기 섭취를 피하는 것이좋다. 양고기를 동(銅)그릇에 요리하면 동 그릇의 산이 고단백의 양고기와 결합해 유독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참고문헌: 동의보감, 약선재료학(강무근, 최미애 외) 약선조리 이론과 실제(한복선 외) 기타[출처] 양고기의 효능 | 작성자 도꼬마리 다음호에는 염소, 사슴, 말고기의 쓰임새와 궁합편을 소개합니다.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양산유물전시관이 지난 11일 성황리에 개관식을 치렀다. 개관 이후 첫 주말에 약 1천500명의 관람객이 유물전시관을 찾았으며, 평일에도 평균 300여명이 찾아 유물전시관에 대한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전시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양산역사실, 양산고분실, 어린이역사체험실, 3D입체영상관,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관람객들은 4층 양산역사실을 시작으로 한 층 한 층 내려오며 양산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별, 시기별로 접할 수 있다.
소비자라면 누구나 맛 좋은 과일을 원한다. 하지만 모든 과일이 언제나 달콤한 맛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15년 과일 장사꾼 정경효 씨가 말하는 맛있는 과일 고르는 비법은 ‘숙성’이다. 사람들이 과일을 고르는 경우 ‘신선함’에 대한 착각으로 실수를 많이 한다고 한다. 멜론, 수박 등은 꼭지 상태를 보고 싱싱한 것만 고르는데 이는 고수의 선택이 아니라고. 정 씨는 멜론은 수확한지 2~3일 정도 지난 것이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숙성’이라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과일도 출하 후 적당한 ‘묵힘’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과도 그렇고 수박도 그렇죠. 많은 과일들이 조금씩은 숙성의 기간을 가져야 합니다. 출하 당시 대부분 완전히 익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품목마다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 두 달 까지도 창고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비자들도 이를 신선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맛이 익어가는 기간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물론 모든 과일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딸기와 같은 과일들은 익는 시기가 짧은 만큼 오래 둬서 맛을 숙성시키기 힘들다. 싱싱할 때 먹는 게 가장 좋은 것이다. 굳이 조언을 하자면 딸기는 빛깔이 좋아야 한다. 윤기가 흐르고 붉은색이 선명해야 한다. 사실 딸기는 고르는 것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재래시장에서는 충분히 몇 개씩 맛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대신 마트 등 ‘맛보기’가 불가능한 곳에서 딸기를 살 때면 정 씨의 조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맛 좋은 과일은 역시 ‘제철 과일’이다. 제철에 생산되는 과일은 스스로 익기에 가장 알맞은 온도와 습도에서 자연스럽게 익어 온 과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우스 과일에 비해 맛도 뛰어날 뿐 아니라, 영양소 함유도 더 높다. 하우스 과일 보다 농약이나 비료도 덜 사용하게 되고 그만큼 ‘유기농’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값이 싸다. “시장에 오시면 한 번 들러 주세요. 제철 과일이면 더 좋고 아니라도 좋은 과일은 많이 있습니다. 맛은 저희 단골손님들이 보증하실 겁니다. 와서 한 입 맛보시고 사도되고요. 말씀만 잘 하시면 ‘덤’도 기본입니다. 허허~!”
20년 전 정경효(52) 씨는 아동복 전문점을 운영했다. 동대문, 남대문 등 시장에서 떼어 온 옷들을 팔아 꽤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이른바 ‘시장표’로 불리던 ‘브랜드’ 없는 옷들을 부모들은 아이에게 더이상 입히려 하지 않았다. 대형 기업에서 생산한 ‘브랜드’ 제품이 속속 문을 열었고, 정 씨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비 형태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997년 터진 IMF 사태는 결국 정 씨 가게를 문 닫게 했다. 정 씨는 아동복 가게를 접고 남부시장 한 구석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과일나라’라는 간판을 걸고 재기에 도전했다. 초기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정 씨는 맛 좋은 과일만 확보하면 충분히 소비자들의 발길을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정 씨가 산지에서 직접 맛보고 가져온 과일들은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덕분에 장사는 성장세를 보였다. 4년, 5년이 지나면서 단골도 많이 늘어났다. 그런데 2004년 중부동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다시 한 번 달라졌다. 서서히 손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젊은 손님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차이가 나죠. 마트가 들어서기 전에 시장에 사람이 많았어요. 주문전화도 많았고요. 시장 자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저절로 수익이 발생했죠. 그런데 마트가 생기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아무래도 마트가 편하잖아요. 시장보다 동선도 짧고 시설도 잘 돼 있고. 젊은 사람들은 마트로 가게 마련인거죠” 상승세를 타던 과일장사도 그때부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정 씨의 표현대로라면 ‘밥은 먹고 살지만 저축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단골 고객 덕분에 최소한의 수익은 발생하고 있지만 돈을 모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현실인 것이다. 최근 전통시장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 탓에 대형마트에서 반강제적 ‘의무휴업’을 실시하고는 있지만 이 역시 큰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정 씨는 “우리 지역에서도 마트가 한 달에 두 번씩 쉬기 시작한 게 몇 달 전부터지만 솔직히 그 효과는 전혀 모르겠다”며 “아예 마트가 없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단순 휴업보다는 상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5일장이 전통시장 망치고 있다” 정 씨는 5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흔히 ‘장날’하면 전통시장의 분주한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상인들 입장에서도 ‘한 몫 잡는 날’이 될 게 뻔해 보인다. 하지만 정 씨의 설명은 이러한 일반적 생각을 깨고 있다. 정 씨는 “5일장이 서는 날이면 기존 상인들보다 외지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이 시장을 점거해 버리기 때문에 기존 상인들에 이득이 될 게 없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각종 좌판으로 시장이 복잡해지기만 하고 시장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불편을 줄 뿐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시장 규모가 작고 품목이 다양하지 못하다 보니 5일장이 열려야만 소비자가 다양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죠. 그래서 다들 장날을 기다리는 거고요. 하지만 이제 아니잖아요. 이미 전통시장도 상설시장으로 없는 물건이 없는 곳이 됐는데…. 이제 5일장은 오히려 시장을 위축시키고 있어요” 정 씨는 5일장이 열리기 전날과 다음날은 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눈에 띠게 줄어든다고 말한다. 정 씨의 설명대로라면 보통 한 달에 6번의 장이 서니까 최소 12일은 손님이 평소보다 오히려 줄어든다는 계산이다. 5일장에 대형마트까지 장사 환경은 정 씨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장사치가 주변 환경 탓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 정 씨는 골목상권으로 살아남는, 버티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단골에게 주는 신뢰’를 꼽았다. “단골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마트와의 경쟁에서 장점이 되기도 하고요. 마트 과일은 사실 시장 과일보다 맛이 떨어집니다. (마트가) 가격 경쟁에서 우위에 서려다 보니 도매상과 납품업자들에게 세일 가격에 맞추라고 강요하죠. 결국 도매상 입장에서는 세일가격에 납품하려다 보니 조금 질 낮은 과일들을 공급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면 안 돼요. 마트보다 설령 조금 비싼 과일을 내놓더라도 우선 맛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단골들이 우리를 신뢰하게 만들어야죠. 시장은 고객에게 신뢰를 못주면 버틸 수 없습니다” “남은 경쟁력은 소비자 신뢰” 소비자들은 이러한 정 씨를 신뢰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 씨가 공급하는 과일을 신뢰하는 것이다. 정 씨 설명에 따르면 일부 고객들은 포장 박스에 표기된 생산자 이름을 기억하고 꼭 그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생산자 이름을 대면서 물건은 보지도 않을 정도라고. 또 마트에서 차량 가득 공산품을 구입한 고객도 과일 만큼은 꼭 정 씨 가게에서 사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소비자의 입맛이 생산자를 신뢰하게 만들고, 공급하는 사람은 이러한 신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정 씨의 장사 철학이다. “사실 마트와 가격 싸움에서 이기긴 힘듭니다. 대신 과일이라는 품목은 금액 보다 맛이 더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맛 좋은 과일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저는 산지에서 직접 과일을 구매하기도 하고 믿을만한 중간 도매상을 거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경매시장에 직접 나가보기도 하고요. 좋은 제품을 구해야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거든요. 이제 우리 전통시장은 단골들의 신뢰를 잃어버리면 도저히 버텨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해요” 평소에는 시설 좋고 편리한 대형 마트와, 장날에는 외부에서 유입된 장사꾼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정 씨. 경기는 여전히 바닥이고 시장을 찾는 손님의 발길은 줄어들고 있지만 맛에 대한 단골들의 신뢰 하나를 무기로 오늘도 작은 가게 구석에서 그는 ‘맛 좋은 과일’을 외치고 있다.
암울했던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와 9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를 위한 힐링 콘서트 ‘추억에 美치다’가 열린다. 본지 창간 1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이번 콘서트는 오는 27일 양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오후 3시와 7시 30분 두 차례 진행된다. 1981년 활동을 시작한 그룹 동물원은 ‘널 사랑하겠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주옥같은 히트곡을 남기고 현재 원년멤버 박기영, 유준열과 6집부터 정식 멤버가 된 배영길 3명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2003년 9집 ‘동물원의 아홉 번째 발자국’ 이후 활동이 뜸했으나 2013년 연간 프로젝트 공연을 진행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동물원은 이번 공연에서 ‘거리에서’, ‘변해가네’, ‘널 사랑하겠어’ 등을 관객들에게 선사하며 그들의 따뜻하고 감성어린 목소리로 우리의 지난 기억과 추억을 되살리며 향수에 젖어들게 할 것이다. 1991년 프로젝트 포크 록 그룹 소리창조의 보컬리스트로 데뷔한 박정수는 그해 솔로가수 활동을 시작해 92년에 2번째 개인 음반을 발표했다. 이후 97년 3집 발표 후 라디오 프로그램 MC로 활약하며 활동하고 있다. 섬세한 목소리와 폭발적인 감성으로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미우나 고우나’ 등을 들려줄 예정이다. 90년대 원조 아이돌로 손꼽히는 심신도 무대에 오른다. 심신은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을 누르고 가요톱10의 골든컵 등을 수상하며 대한민국에 선글라스와 권총춤 유행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그는 지난 2001년부터 미국 시애틀에서 재즈를 수학하고 돌아와 2011년 ‘아프다’라는 싱글 앨범을 발매한 후 2013년 신곡 ‘드림 인 러브’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데뷔곡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를 비롯해 ‘오직 하나뿐인 그대’, ‘욕심쟁이’, ‘드림인러브’ 등을 선보인다. 1994년 ‘칵테일 사랑’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마로니에는 2011년부터 마로니에 프렌즈란 이름으로 새롭게 활동하고 있다. 성대결절로 인해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했던 김정은이 최근 기적적으로 목소리를 회복해 지난 2010년부터 조금씩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미국 5개주를 돌며 세계 고아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펼쳐 ‘천사 가수’로 불리고 있는 이들은 히트곡인 ‘칵테일 사랑’을 비롯해 ‘미라클’, ‘왓어필링’, ‘아시나요’ 등 휴식 같은 음악을 제공한다. 각각의 추억과 향수로 무장한 4인 4색의 무대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슴 속 아련한 추억을 공유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자. 예매는 양산시민신문, 경남은행 양산 전 지점, 농협중앙회, 동양산농협, 웅상농협, 물금농협에서 가능하며 문의는 362-6767로 하면 된다.
영국이 인도에 진출기지를 처음 만든 것은 1619년에 인도 중서부해안의 수라트 지역이다. 이후 동인도회사를 마드라스, 봄베이, 캘커타에 설치하였다. 1757~1857년 기간을 동인도회사에 의한 인도 점령기로 볼 수 있다. 동인도회사는 1850년경에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대부분지역을 지배하게 됐다. 1857년 세포이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 지배를 영국의 직접지배로 전환했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쟁취한 독립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모한다스 간디와 자와하랄 네루가 이끄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영국은 인도 전체를 힌두교의 인도와 회교의 파키스탄으로 분리해 독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자무, 카시미르주의 경우 회교도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인도로 편입돼 독립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지속적인 분쟁지역으로 남게 됐다.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결과 동파키스탄이 파키스탄에서 분리돼 방글라데시라는 별도의 국가로 탄생했다. 독립 이후 유고, 인도네시아 등과 함께 비동맹의 맹주로 군림하던 인도는 영국식 민주주의하에 사회주의 경제를 모방해 국가가 경제의 주요부분을 통제해 왔으나 경제 발전에 실패했다. 1991년에 외환위기를 맞게 되자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시장을 개방하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했다. 이 기간 중 발생한 걸프전에서는 미국을 지지해 이라크를 공습하는 미군기에 연료를 공급하는 등 당시 국제사회의 비동맹 국가들과는 다른 노선을 취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괴뢰’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됐으며 결국 비동맹의 맹주라는 국제적인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 인도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부탄, 몰디브와 함께 남아시아로 분류된다. 남아시아 국가들은 1985년에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남아시아지역협력기구(SAARC)를 발족시켜 정치·경제적으로 공동협력을 모색하고 있으나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적대적 감정으로 인해 원할한 협력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양원제인 인도 국회 인도의 국회(Parliament)는 하원(Lok Sabha)과 상원(Rajya Sabha)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주(State) 및 연방직할지(Union State) 의회에서 선출되는 238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12명을 포함해 총 250명으로 구성된다. 임기는 6년이며 매 2년마다 ⅓씩 새로 선출한다. 하원은 각 주와 연방직할지에서 선출되는 의원 543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앵글로·인디안 커뮤니티의 대표 2명 등 총 545명으로 구성된다. 하원의장(Speaker)과 부의장(Deputy Speaker)은 하원의원 중에서 선출한다. 만 25세 이상이 돼야 하원의원이 될 수 있고 임기는 5년이며, 비상시에는 국회에서 법으로 1년 이내로 한 번 연장할 수 있다. 인도는 하원의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구성해 정권을 잡는다. 과반수를 차지하는 정당이 없는 경우 의석수가 많은 당이 여러 개의 소수당을 포섭해 연합으로 National Front, United Front 등을 결성해 과반수를 넘겼음을 입증하면 내각을 구성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 의석수가 많은 당이 나서지 않는 경우에는 소수당들끼리 과반수 미달의 연합을 구성한 후에 의석수가 많은 당 하나가 내각 구성에는 불참하고 외부에서 지원하겠다고 선언해 과반수를 넘겼음을 입증하면 과반수 미달 연합이라 해도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 1998년 총선 후 결성된 연합전선이 후자의 경우로서 외부에서 지원하는 당은 당시 국민회의당(Congress(I))이었다. 이 경우 국민회의당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연합전선 정부가 들어주지 않아 외부로부터 지원을 철회한다고 선언하면 연합전선 정부는 하원에서 과반수의 신임을 못 받는 결과가 되므로 새로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과반수를 입증해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입증하지 못하면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로 간다 인도 선거는 우리나라 처럼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2~3주씩 걸린다. 2004년 4월 인도 제14대 하원의원 총선으로 국민회의당(Congress(I))이 다수당이 됐으나 과반을 넘기지 못해 공산당 계열등과 연합해 정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1991년 인도 경제개혁을 주도했던 당시 재무장관 만모한 싱이 수상이 됐고 당시 상공장관이었던 치담바람이 재무장관이 돼 인도의 경제 성장을 다시 이끌었다. 2009년에도 국민회의당은 제1야당인 BJP를 누르고 제1당이 돼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재미있는 정당의 심벌 인도는 5년마다 직접선거로 하원의원(543명)을 뽑는다. 2004년 5월 선거에서는 여당인 인도국민당(BJP)이 패하고 8년 동안 야당이었던 국민회의당(INC)이 하원의 다수당이 됐다. 2009년 5월 선거에서도 국민회의당이 승리했다. 인도는 선거철만 되면 거리를 각 정당 벽보로 도배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각각의 정당을 상징하는 심벌의 등장이다. 거리 벽보에는 후보의 얼굴사진보다 소속 정당의 심벌이 더 많이 사용된다. 이는 투표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하층민이 상당수 글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투표용지에는 당의 상징 그림과 함께 후보자 이름을 명기하며 투표자는 심벌을 보고 투표한다. 정당 심벌을 보면 매우 재미있다. 해방 후 거의 50년 간 인도정치를 지배해온 국민회의당 심벌은 오른손 손바닥, 힌두 우선을 주장하는 인도국민당 상징은 연꽃, 자나타달은 물레바퀴, 남인도 타밀나두주의 DMK는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으로 한다. 코끼리, 횃불, 자전거, 두 개의 나뭇잎, 트럼펫, 활과 화살, 램프, 팽이, 망고 등을 심벌로 하는 정당도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추가로 99개의 그림을 예비 심벌로 등록해 놓고 있다. 예비 심벌에는 기차, TV, 지팡이, 호루라기, 가위, 톱, 의자, 선풍기, 배, 연, 주전자, 소방차 등 다양하다. 손바닥 심벌은 믿고 따르라는 뜻 외국인이 보기에는 단순한 정당 심벌이 인도인에게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국민회의당의 오른손바닥 그림은 매우 상징적이다.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많은 아랫사람 앞에서 지금부터 내가 말을 하겠다 할 때 오른손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선서하듯이 든다. 여기에는 내가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좋은 것을 해주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므로 나를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인도의 많은 신의 조각이나 그림이 오른손바닥을 들어 보여주는 것은 자기가 은총을 내려준다는 뜻을 내포한 것이다. 절에 가면 부처님이 오른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들고 있는 것이 이런 이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인도국민당의 연꽃은 힌두교의 심벌로서 힌두신화와 관계가 있다. 연꽃은 지혜를 의미한다. 더러운 연못에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혼탁하고 더러운 세상에서는 지혜 있는 사람만이 연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것이다. BSP당의 심벌 코끼리는 가네샤라는 코끼리 얼굴의 신과 관련이 있는데 강한 힘과 현명함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공동생활을 하면서 약한 자를 돌보는 코끼리처럼 약한 하층민을 돌보는 정당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심벌이다. 그 외에 시브세나 당은 ‘마하바라타‘라는 고전을 근거로 활과 화살을 심벌로 한다. 인도 정당의 심벌은 약한 자를 돌보고 이끌어가는 당이라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심벌과 같이 약자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메기들로 상징되는 수백만평의 농경지가 양산천을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양산은 197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농촌마을이었다. 지금의 종합운동장과 체육관 자리에서 시작된 들판은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호포까지 연결된 곡창지대였다. 하지만 이곳도 조선시대까지는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발생한 낙동강의 범람으로 곡수가 신통치 않은 저습지가 대부분이었다. 오죽하면 경작농민들이 조정을 향해 농지세를 감면해달라고 수없이 청원을 올렸겠는가. 메기들이라고 부른 이유도 뻘밭에 메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이들이 침만 흘려도 강물이 범람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정도다. 메기들판이 최상급 곡창으로 거듭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日帝)가 저지른 식민지 수탈(收奪)의 결과물이었다. 홍수를 방지한 양산천 제방을 새로 쌓고 대규모 경지정리가 시행된 것이 일제강점기였다는 말이다. 조용한 농촌이 산업화의 태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지난호에 이야기한 것처럼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 큰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지방행정단위의 구역조정이 있었는데 1973년 경남도의 동래군을 양산군에 통합한 것이었다. 당시 군세(郡勢)로 보아서는 동래군이 경남도 내에서도 가장 컸는데 어찌된 판인지 우리군에 예속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군은 획기적인 발전의 기폭제가 됐지만 동래군 지역의 유지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개중에는 합병 이후에 우리군 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이렇게 지금의 부산시 기장군 일대와 울주군 서생면까지를 포함한 큰 관할구역을 가지게 된 양산군이었지만 도시기반시설은 한참 낙후돼 있었다. 당시 군청이 있던 북부동(지금의 중앙동사무소 자리) 주변의 간선도로가 비포장 자갈길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도로변 가옥들은 대부분 오래된 기와나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다. 부산과 언양을 오가던 ‘빨간 버스’가 지나갈 때면 흙길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 양쪽의 가옥은 흡사 탄광촌처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곤 했다. 1970년 추석 무렵에는 비포장 자갈길을 달리던 버스가 동면 내송마을을 막 지난 곳에서 하천으로 추락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도 있었다. 지금의 경남은행 사거리에서 북부동 신한은행(옛 버스 터미널 자리) 까지의 간선도로변에 대한 소도읍가꾸기 사업이 시행된 건 1970년대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15m 폭의 도로를 확보하고 기존 가옥을 철거한 자리에는 3~4층의 새 건물이 들어섰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던 양산면(당시)소도읍가꾸기 사업은 토지나 건물 소유자들의 반발로 상당한 곤혹을 겪기도 했다. 1공구였던 경남은행 사거리에서 지금의 등기소 입구까지 한 블록에 불과한 구간의 추진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도로에 편입되는 땅의 보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장도로를 내주면 그만큼 주변 지가가 올라가니 그걸로 상쇄하자는 논리다 보니 주민들과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담당 공무원이 현장에서 반대하는 주민들로부터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니 어려웠던 상황이 짐작이 된다. <사진1>은 바로 그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넓어진 새 도로와 맞닿게 새로 짓는 건물이 보이는가 하면 그때까지도 철거되지 않은 기존가옥들에도 여전히 주민들이 살고 있다. 사진처럼 도로 한쪽은 그대로 있고 한쪽만 확장하는 방식이었던 것이 지주들의 반발을 많이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경남은행 사거리에서 똑딱골(옛 터미널 영일약국 인근) 사이로는 큰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중부동 산성 부근에서 내려오는 소하천이 신기에서 내려오는 용수로와 마주치는 곳인데 1970년대에 복개되어 지금은 원도심 간선도로인 삼일로가 되었다.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양산의 제일 중심은 바로 이곳 경남은행 사거리였고 1980년대까지 가장 비싼 땅으로 거래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심의 외형적인 모습이 탄생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건물 신축에 나섰던 일부 주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경우도 나오는 등 도시화의 과정에서 애환이 뒤따르기도 했다.
돼지고기의 성분 돼지고기는 다른 육류에 비해 비타민B군이 풍부하고 양질의 단백질과 각종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 특히 비타민B1의 함량은 쇠고기보다 무려 10배가 많아 돼지고기 100g 정도만 섭취해도 비타민B1의 하루 필요량을 채울 수 있다. 비타민B1은 빵이나 밥과 같은 탄수화물을 에너지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신경이나 근육이 제 기능을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이다. 효능 1.동맥경화증, 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 돼지고기에는 불포화지방산(아라키돈산, 리놀산)이 많이 들어있어 혈관내 콜레스테롤의 축적을 막아주며 혈류를 왕성케 한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중국인들에게 고혈압 환자가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2.카드뮴, 납 등 중금속 해독 작용 돼지고기의 지방은 융점이 사람 체온보다 낮아서 대기오염, 식수, 술, 담배 등에 시달리는 현대인들 몸 안에 축적된 노폐물을 체외로 밀어내어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특히 카드뮴과 납 등 중금속 해독과 탄광촌의 진폐증 예방에 좋다. 3.젊고 탄력 있는 피부 돼지고기에는 다른 육류에 비해 특히 비타민 B군이 많이 들어 있으며, 양질의 단백질과 각종 영양소가 들어있는 고영양식품으로 곱고 윤택한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유지시켜 준다. 4.어린이 성장발육에 좋다 돼지고기에는 인(P), 칼륨(K)등이 많이 들어 있으며,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여 성장기의 어린이 학생,수험생의 영양식으로 좋다. 부위별 명칭과 조리 용도 ·삼겹살 : 살과 지방이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어 대부분 구이로 먹는다. 서양에서는 베이컨, 중국에서는 동파육 재료로 이용하며 푹 삶아 보쌈으로 먹으면 특히 맛이 있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부위이기도 하다. ·목살 : 목살은 삼겹살에 비해 지방이 적으면서도 쇠고기처럼 골고루 퍼져있어 풍미가 좋고 육질이 부드러워 근래에 와서는 삼겹살 다음으로 구이용으로 인기가 있다. ·갈매기살 : 소고기의 안창살에 해당하는 부위로 갈비살 끝부분이다 구워도 육즙을 그대로 품고 있어 미식가들은 갈매기살을 돼지고기 부위 중 최고로 친다. ·갈비살 : 갈비살은 뒤에서부터 다섯 번째 갈비부위를 자른 것이고 6번부터는 삼겹살이다. 양념해서 구워먹거나 찜으로 많이 먹으며 최근에는 서양식 바베큐가 유행하면서 많이 소비되고 있다. ·안심 : 갈비 안쪽에 붙어있는 안심은 지방이 거의 없어 돈까스, 잡채, 카레 등에 많이 사용되며 돼지고기 중 가장 부드러워 서양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위이다. ·등갈비 : 1~5번의 갈비를 잘라내고 6번부터 옆구리 삼겹살을 떼어내고 나면 등갈비가 남는데 바베큐나 김치찜용으로 많이 먹는다. ·사태살 : 앞다리와 뒷다리의 운동 근육으로 결이 거칠지만 찌개나 장조림용으로 사용하며 김장철에는 보쌈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등심 : 갈비 윗쪽 등을 감싸고 있는 등심은 순살코기로만 되어있지만 운동량이 적은 부위라서 매우 부드럽다. 돈까스, 카레, 잡채, 장조림 등 다양하게 쓰인다. ·앞다리살 : 찌개나 불고기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며 값이 다른 부위에 비해 저렴해 구이용으로도 쓰인다. ·뒷다리살 : 앞다리와 마찬가지로 가격이 저렴하며 식당에서 돼지불고기나 제육볶음을 주문하면 거의 이 부위가 사용된다. 돼지고기와 궁합이 맞는 식재료 ·새우젓 새우젓은 20% 이상이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단백질 분해에 도움이 되는 프로테아제(Protease)뿐만 아니라 지방분해효소인 리파아제(Lipase)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소화에 도움이 된다. ·표고버섯 돼지고기에는 콜레스테롤이 다량으로 들어 있어 심장병, 고혈압, 동맥경화 등에 걸릴 위험이 크다. 하지만 돼지고기 요리에 표고버섯을 곁들인다면 콜레스테롤의 피해도 줄이고 각종 성인병 예방이 가능하다. 표고버섯에는 양질의 섬유질이 많아 콜레스테롤이 체내에 흡수되는 것을 억제하며 체내의 콜레스테롤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상추 육류에 부족한 비타민C와 베타카로틴 섬유질을 보충해 주기 때문에 궁합이 맞다. 고기만 먹는 것보다 상추와 곁들이면 그만큼 고기의 섭취량을 줄일 수 있고, 자연스럽게 칼로리를 낮출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상추는 육류에 부족한 비타민C와 베타카로틴, 섬유질을 보충해준다. 뿐만 아니라 체내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것을 막아주고 피를 맑게 해준다. 돼지고기와 최고의 찰떡궁합은 역시 상추인 것이다. ·마늘, 양파, 부추 알싸한 향 성분인 황아아릴을 함유하고 있어 돼지고기의 비타민 B1의 흡수를 돕고 당질의 에너지 변환을 촉진하여 비만 방지에 효과적이다. 마늘의 알리신(Allicin)은 돼지고기의 티아민 소화흡수를 용이하게 한다. 또한 돼지고기의 잡냄새를 없애는 데 효과적이다. ·생강, 계피, 월계수, 녹차, 후추, 커피 돼지고기의 누린내 및 잡냄새를 제거한다. ·김치 김치도 천연 소화제 역할을 한다. 김치가 발효되는 과정에서 다량의 프로타아제가 생성되어 소화제 구실을 한다. 돼지고기의 주성분 중 하나인 단백질이 소화되면 펩타이드를 거쳐 아미노산으로 바뀌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단백질 분해효소인 프로타아제이다. 돼지고기와 궁합이 맞지않는 식재료 ·인삼 돼지고기는 소양인 음식으로 성질이 비교적 찬 편에 속하며 인삼은 소음인 음식으로 성질이 아주 따뜻한 약이다. 삼계탕에 인삼을 넣는 이유는 닭이 가지는 성질이 따뜻하기 때문이며 따뜻한 닭에 인삼을 넣어서 보양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돼지고기와 인삼이라면 마치 짬봉과 짜장을 섞어버리는 것처럼 궁합이 맞지 않는다. ·감초, 도라지, 황련 감초(甘草)가 들어간 약을 복용할 때는 배추,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며, 일설에는 감초를 먹고 배추를 먹으면 병이 낫지 않는다고도 했다. 황련(黃連), 길경(桔梗 도라지)이 들어간 약에도,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며, 특히 황련(黃連)에는 절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데, 만일 황련을 3년 동안 복용했다면 일생동안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냉면, 냉채, 아이스크림 돼지고기와 궁합이 안 맞는 음식은 찬 음식으로 아이스크림, 냉면, 냉채, 얼음 등이다. ·따뜻한 성질의 음식 찬 성질의 돼지고기는 인삼, 꿀, 로열젤리, 장어, 조기 같은 따뜻한 성질의 음식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참고문헌: 약선재료학(강무근, 최미애 외) 약선조리 이론과 실제(한복선 외)다음 호에는 양과 염소고기의 쓰임새와 궁합편을 소개합니다. . 퓨전 돼지고기요리 폭찹(Pork chop) 재료(2인분) 돼지목살 200g, 양파 50g, 생표고버섯 50g, 적황 피망 50g, 다진마늘 1큰술, 케첩 3큰술, 굴소스 1큰술, 소금, 후추, 고춧가루 약간, 식용유 3큰술 만들기 1. 돼지고기목살은 두껍게 구매하여 깍둑썰기하고 양파, 버섯, 피망도 큰 사각으로 잘라놓는다. 2.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열을 가하여 잘라놓은 돼지고기를 넣어 약간의 브라운색이 날 정도로 볶은 다음 다진마늘과 야채를 넣어 볶아준 다음 토마토 케첩과 굴소스를 넣고 간을 보아가며 소금, 후추와 약간의 고춧가루를 넣어 마무리 한다. 간장불고기 재료(2인분) 불고기용 돼지고기 300g, 다진마늘 1큰술, 다진파 1큰술, 양파 50g, 양송이버섯 50g, 불간장 3큰술, 물엿 1큰술, 참기름 반큰술, 깨소금 반큰술, 고춧가루 약간, 후추가루 약간, 식용유 2큰술 만들기 1. 돼지고기는 불고기용으로 구매하여 골고루 펴놓고 양파, 버섯은 큼직하게 썰어 놓는다. 2. 나머지 재료를 전부 혼합하여 양념장을 만들어 고기와 채소를 넣어 재어 놓는다. 3.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넣어 불에 올려 열을 가한 후 재어놓은 불고기를 넣어 적당히 익혀내면 맛있는 돼지고기 간장 불고기가 된다.
가을 하늘만 푸른 건 아니었다. 겨울바람이 자취를 감추자 수줍은 듯 고개 내민 매화는 푸른 봄 하늘을 등지고 환한 미소를 피워냈다. 지난 23일과 24일 이틀 간 원동면 영포리 일대에서 열린 ‘제7회 원동매화축전’은 연인, 부부, 가족이란 이름의 상춘객들을 유혹했다. 축전을 찾은 이들은 매화 향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옛 추억을 더듬고, 새로운 추억을 기록해갔다. 이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봄의 전령 매화는 먼 길 자신을 찾아준 상춘객들에 감사 인사 대신 ‘휴식’을 선물했다. 이처럼 ‘제7회 원동매화축전’에는 매화향기와 상춘객의 웃음, 그리고 어머니 품 속 같은 포근한 봄 햇살이 있었다.
“솔직히 문을 닫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은 안 해요. 시장이란 곳은 어린 시절 엄마 손 잡고 따라와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먹을거리를 맛보는 곳인데 세월이 지나면 그 모든 게 추억이 되잖아요. 저희도 마찬가지로 15년 전 가족과 함께 먹었던 치킨의 맛은 세월이 흐르면서 추억이 되고, 그 때의 맛을 그리워하게 되거든요. 그게 시장 가게의 매력인 것 같아요” ‘골라잡아’를 외치며 호객행위에 바쁜 젊은 상인과 그 옆에 쭈그려 앉아 채소 한 짐을 풀어놓고 말 한 마디 없이 지나는 손님을 쳐다만 보는 노파. 하루에도 수 백, 수 천 명이 오가며 ‘사람냄새’ 풍기는 곳. 바로 ‘시장’의 모습이다. 이런 ‘사람냄새’ 풍기는 시장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15년째 ‘닭 장사’를 해 온 가게가 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양산에서 이 집 모르면 간첩이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 곳. 바로 중부동 남부시장에 위치한 ‘울통치킨’이다. ‘울통치킨’이 남부시장에 문을 연 건 약 15년 전이지만 사실 통닭 가게를 시작한 것은 35년도 넘는다. 35년 전 최종덕(67) 씨와 아내 황혜숙(59) 씨가 어곡공단 한켠에서 문을 연 가게는 당시 공단 근로자, 특히 중국계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최 씨 부부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자신들을 응원해 줬던 이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 시절 단골들은 15년 전 지금의 위치로 가게를 옮겨 온 후에도 큰 힘이 됐다. 장을 보러 왔다가 최 씨 부부의 가게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하며 ‘홍보대사’ 역할을 자처했던 것. 가게 위치를 옮겨도 단골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손님과 약속이 돼 버린 ‘연중무휴’ ‘울통치킨’은 아침 7시 30분에 문을 열어 저녁 11시 30분까지 영업을 한다. 쉬는 날은 1년에 단 이틀 설과 추석 당일뿐이다. 하루 16시간씩 363일을 일하는 셈. 몇 년 전부터 가게를 책임지고 있는 딸 최정아(37) 씨와 사위 조창환(40) 씨도 힘든 것은 사실이다. “솔직히 힘들죠. 어떤 때는 제가 어딘가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항상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 많은 사람을 상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쉴 수가 없어요. 설과 추석을 빼고 연중무휴라는 게 어느새 손님과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 돼 버렸거든요” 최 씨 스스로 ‘갇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탈을 꿈꾸기 힘든 상황이기에 함께 가업을 이어보자며 남편을 구슬린 게 미안하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제쳐놓고 최 씨가 부모의 가게를 이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15년 간 만나온 ‘사람’과 시장 가게로 쌓아온 ‘전통’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삼아 일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15년이 흘렀는데 그 시간동안 저도 모르게 이뤄 놓은 것들이 있더라고요. 시장 속에서 15년 간 장사를 해온 우리 가게는 나름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저는 수많은 손님들을 만나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얻으며 성숙해 왔더군요. 전 그걸 잃고 싶지 않았어요” 박리다매, 조류독감도 이겨내 박리다매(薄利多賣). ‘울통치킨’ 영업 기술의 핵심이다. 맛과 더불어 ‘시장 가게’에 걸맞게 싼 가격으로 경쟁력을 지켜 나간다는 작전이다. 35년 전 처음 가게를 시작하던 당시 7천원이었던 후라이드 한 마리 가격이 현재 1만2천원. 35년 동안 5천원이 오른 셈이니 다른 물가에 비해 분명 저렴한 셈이다. 하지만 최근 ‘두 마리 치킨’의 공습(?)에 한 마리 값 치곤 비싸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실제로 ‘울통치킨’은 한 마리에 1만2천원이니 두 마리면 2만4천원. ‘2마리 치킨’ 가격이 보통 2만원 내외니까 단순 비교로만 보면 분명 비싸다. 하지만 최 씨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마리당 가격만 보면 분명 저희가 비싸게 느껴지죠. 하지만 양을 보면 조금 달라요. 같은 2마리를 놓고 보면 우리가 조금 더 많아요. 그래서 가격에서 두 마리 치킨과 사실 별 차이가 없는 거죠. 물론 맛이 없다면 싼 가격도 소용없겠지만…” 비슷한 가격에도‘박리다매’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1만2천원으로 먹을 수 있는 치킨이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최 씨는 불황을 경험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조류인플루엔자가 처음 논란이 되던 당시에도 한 달 정도 매출이 줄어들긴 했지만 적자가 날만큼은 아니었다고. 오히려 줄어든 주문 덕분에 드라마를 보며 쉴 수 있어 내심 기쁜 마음도 들었다는 최 씨의 말에 지금도 불황에 대한 걱정은 없는 모습이었다. 명품손님도 입맛은 추억을 따라 이날 기자는 식당에서 가장 한가하다는 때인 오후 2시 반에 맞춰 가게를 방문했다. 하지만 ‘울통치킨’ 식구들의 손놀림은 쉬지 않았다. 어머니 황혜숙 씨가 “지금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라며 기자를 반겼지만 그 역시 식탁 한쪽에서 물김치를 놓고 늦은 점심을 급히 해결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손님들이 밀려왔다. 딸 최정아 씨가 손님 일행 중 한사람에게 “이모 머리 자르셨네요”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그들 역시 단골인 듯 했다. 3시를 넘어가자 주문 전화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인터뷰를 하는 기자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급한 마음의 기자와 달리 ‘울통치킨’ 식구들은 여유가 넘쳤다. 물론 손놀림과 발걸음은 바삐 서두르지만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졌다. 치킨과 맥주를 주문한 손님들 역시 보채지 않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 순간 ‘이게 바로 시장이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시대가 변해도 부모가 사다준 치킨의 맛은 잊지 않는다는 최 씨의 말. 최 씨가 경제가 발달하고 나날이 편리함을 찾는 시대에 전통 시장이 작아질지는 몰라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역시 ‘사람’과 ‘추억’이 함께 숨 쉬고 있는 시장이기 때문이다.